책읽기

건국의 정치 <1>

키프트 2025. 4. 25. 17:47

김영수, <건국의 정치>, (이학사, 2006)
 
보수적인 세계관으로 알려진 성리학이 유일하게 고려라는 이역에서 혁명적 이념으로 재탄생 6
 
당시 26세의 청년이었던 정몽주가 김득배를 위해 지은 제문은 “아아, 황천이여, 나의 죄가 무엇입니까”로 시작 6
 
그 제문이 조선인의 정신적 기원이자 원형 6
 
정도전의 사상이 경학적 성리학으로부터 정치적 성리학으로 재탄생됨으로써 성리학의 혁명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7


<고려의 가을>
 
국가의 공공성 붕괴 17
 
1231년(고종 18) 시작된 몽고의 침략 이래 1356년(공민왕 5) 공민왕이 친원 집권 세력을 제거할 때까지, 120여 년 동안 고려는 정치적 독립을 거의 상실했다. 18
 
북방 민족의 침입에 시달리던 고려는, 몽고의 강력한 힘에 의해 유.례.없.이. 100년의 평화를 누렸다. 18
 
인종과 무종을 원 황제에 즉위시키는 데 조력함으로써 원의 중앙정부에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충선왕 18
 
1388년 최영과 이성계가 연합하여 권문세족들을 대거 제거했다. 19
 
현세에서의 인격적 완성과 정치사회적 평화의 달성을 주장 19
 
여말선초에는 성리학이야말로 당대의 위기에 대한 진정하고도 유일한 실천적 응답 22
 
어떠한 풍경도 배경 없이는 공간적인 깊이를 가질 수 없다. 23
 
고려왕조의 수호자인 동시에 평화의 안전판 25
몽고
 
원의 침략은 상상 이상으로 잔인하고 강력 25
 
중국을 공격하기에 앞서 배후를 안정시키고자 했던 과거 북방 민족들의 전략과 달리 몽고는 30여 년에 걸쳐 파상 공격을 반복하면서 전역을 파괴했다. 27
 


세조 쿠빌라이는 온건책을 채택하여 고려의 國體를 온존시켰다. ... 별도로 종묘 제사를 지내고 독립적인 政令을 시행할 수 있는 나라는 고려가 유일했다. 28
 
충선왕 ... 친모가 원의 공주(齊國大長公主) 29
 
고려는 의종 이래 국가로서의 정당성을 사실상 상실한 상태 31
 
고려의 북방 변경은 언제나 불안정했고, 삼면에 걸쳐 길게 펼쳐진 해안은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 33
 
고려 안에서의 혁신은 한계가 있었다. 제도뿐만이 아니라 정치 세력 자체를 바꾸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성계와 조선의 건국자들 중 다수가 동북방과 남방의 변방인들이었다는 점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37
 
권문세족의 두 번째 권력 장악 수단은 관직의 사적 분배였다. 38
 
인류가 오랫동안 경험한 정치체제는 대체로 혈연적인 특권이나 개인에 대한 충성 여부를 공적인 업무보다 중시해왔다. 39
 
고종 12년(1225) 무신 집권자인 최우가 자신의 사택에 정방을 처음 설치하고 모든 관리들의 인사권을 장악했다. 39
 
무신 정치가 끝난 후에도 정방은 존속되었다. 40
 
관리와 군인, 백성의 공무, 병역 및 납세 의무는 국가의 토지 부여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따라서 토지 제도의 문란은 곧 국가 정당성의 위기였다. 40
 
세족들은 소작인들로부터 소작세뿐만 아니라 부역까지 수취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의미에서 국가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41
마치 유럽의 영주같군...
왕은 조금 더 강력한 귀족이었을 뿐 42
 
고려 말의 정치체제는 일종의 사적인 권력 연합체였다. 42
 
기황후의 아버지부터 3대를 왕으로 추증했다. 요컨대 기씨 일족의 권력은 왕과 대등했다. 44
(사진)
 
정동행성은 원래 일본 정벌을 위해 설치되었다. 뒤에는 원의 고려 지배를 상징하는 기관이 되었다. 48
 
궁극적으로는 권문세족이 정동행성을 통해 원과 굳게 결합되어 있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49
 
정신적 독립성에 대한 자조 52
 
정치적 적실성을 상실하고 형이상학적 완결성이 결여된 유교에서는 정신적 정체성을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 52
 
거사불교는, 현실 비판을 포기함으로써 정치적 의미를 상실한 고매한 정신이 현실과의 고투 없이 완전한 세계에 이르려고 하는 고도의 개인주의적 허위의식을 대표하고 있다. 52
 
코스모폴리탄적인 세계문화를 가졌던 원과의 전면적인 교류는 고려 문화에 광범위하고 심원한 영향을 미쳤다. 53
쿠빌라이는 세계 공용 문자를 고민했었다고 한다. 아마 이 영향으로 세종 때에 한글이 창제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원종 이후 고려와 원은 실질적으로 국경이 없는 상태였다. 따라서 100여 년에 걸친 원과의 교류를 통해 한반도는 역사상 처음으로 선진 문화와 전면적이고 무제한적인 교류를 할 수 있었다. 54
중국과는 달리 원과는 전면적이고 무제한적인 교류를 했다고 한다.
 
충선왕의 만권당은 당대 중국의 최고 지식인들의 교유처 54
 
고려 유학은 중국과 비슷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55
 
폐정 개혁을 위해서는 가문이나 문학적 능력보다는 실천적 윤리성을 갖춘 새로운 정치집단이 필요했던 것이다. 56
 
성리학은 특히 인격의 완성과 참다운 정치의 방법을 체계적으로 제시 57
 


 
<개혁과 전쟁: 공민왕 대 전반기의 정치>
 
당시 중국의 중부와 북부 지방은 가뭄과 기근으로 700만 명 이상이 굶어 죽었으며 63
원 붕괴기
 
두 개의 커다란 전쟁(1359년과 1361년, 홍건적의 침입) 64
 
왕비를 추모하기 위해 무리한 토목공사를 강행함으로써 완전히 민심을 잃었다. 65
 
여말선초의 현실 정치는 이념 변동과 근본적인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에 세력 연구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66
 
충혜왕을 이어 8세인 충목왕이 즉위했으나, 그는 5년 뒤에 죽었다. 공민왕이 왕위 계승의 명령을 받고 행차가 본국으로 떠나게 되었을 때 황제는 결정을 번복하여 충혜왕의 서자인 12세의 충정왕에게 습위를 명령했다. 69
 
공민왕은 1349년 10월 衛왕의 딸 노국공주와 결혼했다. 원은 1351년 10월 충정왕을 폐위시키고 공민왕을 왕으로 삼았다. 70
 
공민왕은 원의 정치적 선택이 매우 불안정하고 돌발적이라는 점을 감안했을 것이다. 73
 
공민왕은 심지어 말 타는 법조차 몰랐고, 그로 인해 홍건적의 침입으로 서울을 떠나야 했을 때 어려움을 겪었다. 76
 
빈민은 한 해 동안 몇 뙈기를 경작하여도 조세가 그 반이 되므로, 한 해를 견디지 못하고 양식이 떨어져 이듬해 농사철이 되면 부호의 곡식을 꾸어 종자와 양식을 마련한다. 81
 
국가권력은 양민의 보호자가 아니라 그 반대였다. 81
 
빚으로 인해 자녀를 팔았을 경우에도 3년이 지나면 돌려보내도록 명했다. 82
 
과거제란 지배적인 사회집단에게 매우 위협적인 제도 84
 
부와 신분의 정치적 영향력을 감소시키고, 엘리트의 열정을 정치적 능력의 향상에 쏟게 함으로써 정치체제의 능력을 증대시킨다. 84
 
전근대 정치체제의 정치 엘리트는 대체로 신분과 군사적 능력에 의해 충원되었다. 일본과 유럽의 봉건제는 전형적인 예로, 학문이나 지식은 부차적인 요소였다. ... 과거제는 정치체제의 성격에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84
 
전근대의 플라톤과 주자는 지식이 인간과 정치체제, 나아가 우주적인 완성을 위해 불가결한 요소라고 생각했다. 84
 
현인을 구하고 밤늦게 밥을 먹고 87
 
공민왕은 또한 훌륭한 관리들에게 극진한 존경의 뜻을 표했다. 원송수가 오면 왕은 반드시 일어서서 기다렸다. 88
 
庸劣 쓸용/ 못할렬 88
 
개혁보다도 대원 관계를 무시하면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90
 
취약한 권력 기반을 지탱해줄 자신의 손발이 필요했던 것이다. 91
 
국정 최고 기관인 都僉議使司 93
 
典法摠郎 정운경 93
 
정치사회의 자원을 배분하는 결정권을 가지고 있으므로 95
 
개혁은 일종의 조용한 내전이다. 95
 

왕은 최고의 권력과 명예를 누리지만, 그 반대로 일종의 고급 노예와 같은 처지에 빠진다. ... 그는 정형화된 양식에 따라 행동해야 하며, 부단히 밀려드는 업무에 대해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고 책임을 져야 한다. 98
 
그의 모든 행위는 타인에 의해 불가피하게 정치적으로 이해된다. 그는 신체의 안락을 위한 모든 서비스를 제공받지만, 정신적 안락에서는 그 반대이다. 98
 
충목왕과 충정왕은 친족들과 권신들의 정치적 도구였다. 99
 
왕이 직접 정치를 주재하지 않을 경우 일차적으로 발생되는 폐해는 의사소통의 장애 100
 
비판은 부정의 감시자일 뿐만 아니라 공론을 통해 부정을 여과시키므로 열린 체제 속의 인간들은 정치적 미덕을 규범화하게 된다. 100
 
정치적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비판자의 용기와 수용자의 냉정한 이해 101
신하의 용기, 왕의 냉정한 이해
 
대부분의 왕들은 비판을 도전과 공격으로 받아들였다. 101
忠言逆耳
 
불행하게도 공민왕이 물려받은 국가는 너무 오래되어 그 개선이 심히 곤란했으며 102
 
조일신은 몽고 통역관으로 출세하여 시중까지 오른 조인규의 손자이다. 104
 
정치는 다른 어떤 활동보다도 사적인 야심의 목표가 될 만한 많은 매력을 가지고 있다. 106
 
측근들은 대개 ‘능력merit’보다 ‘충성심loyalty’ 때문에 기용된다. 106
 
측근 정치의 본질은 결국 정치의 私人化이며, 정치의 私事化를 의미한다. 107
 
측근 정치의 진정한 원인은 권력자 역시 이들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 있다. 왜냐하면 권력자는 언제나 안전에 위협을 느끼기 때문이다. 107
 
한비자 “임금으로서 병들어 죽는 자는 전체의 반도 못 된다.” 107
헐...
 
군주는 대개 현명한 자보다 무능한 자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108
 
조일신은 거의 거리낌이 없었다. 감찰사가 그의 가노를 가두자 조일신을 옥을 부수고 그를 석방했다. 109
 
한비자는 범법이나 반역이 “일찍이 존귀한 지위에 있는 신하에 의해 일어나지 않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109
 
재상들은 물론이고 왕조차 그의 불법행위를 제재할 수 없었다. 110
 
측근들은 일종의 내시형 인간 110
 
그들은 모든 정치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며, 또한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 110
 
측근 정치의 세 번째 폐단은 그들이 왕을 위협하기 시작했다는 점 112
 
정치적 암살자의 대부분은 측근들이다. 113
브루투스 너마저...
 
立省說을 주장하는 자, 또 없을 것인가 ... 즉 고려를 원의 일부로 편입(立省)시키려는 책동 123
 

기황후의 아버지 기자오가 영안왕에 책봉되었기 때문에, 원 정부 내의 지위에서 기씨 일문은 공민왕과 동일했다. 126
 
당시 고려에는 두 명의 왕이 존재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127
 
왕은 원에게 충성을 입증해야 하는 무력한 존재 127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이다. 그의 가문은 대를 이어 쌍성 지방의 다루가치를 역임하고 있었다. 129
 
이런 결심의 배경에는 대륙의 정세 판단이 결부되어 있었다. 129
 
100여 년의 지배가 계속된 마당에, 누가 황후의 일족을 살해하고 원을 적으로 만들 수 있겠는가? 130
 
그들은 단순히 왕명으로 체표될 수 없는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궁중에 재상들을 모든 것도 어떤 점에서는 그들의 향배를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31
 
연호를 따르는 것은 臣屬의 상징이었으므로 이는 독립선언이었다. 134
 
공민왕의 대원 정책은 이처럼 대단히 단호하고 강경했다. 그것은 거의 모험이었지만 그는 일전을 불사했다. 134
 
원은 “80만 병을 동원하여 [고려를] 토벌한다”고 선언했따. 135
 
매우 적절한 시기에 옛 영토를 회복했다. 공민왕 17년(1368) 이후 명과의 국경분쟁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만약 이 시기를 놓쳤다면 고려는 옛 영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139
 
1세기에 걸친 지배와 원 제국의 세련된 문명에 감화 139
 
이제현으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 역시 원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 공민왕은 이제현과 이색으로부터 본격화된 정치 및 문명 운동의 성격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했다. 140
 
몽고의 침략 이래 가장 커다란 전쟁이 6년여 동안 고려를 휩쓸고 지나갔다. 141
 
공민왕은 희망에서 혼란으로 갔다가, 무력감과 자책 끝에 정치에서 퇴장했다. 141
ㅜ.ㅜ
 
공민왕의 개혁이 실패하자 고려의 정치와 문명은 사실적인 의미에서 종말을 고했다. 142
 
가뭄이 극심해지지 공민왕은 실제로 매일 한 끼씩만 먹었다. 143
 
불교는 더 이상 진리가 아니라 또 하난의 착취적 사회제도로 변했다. 149
착취적 사회제도
 
첨설 ... 원나라에 파견할 장군 및 군사들을 격려하기 위한 조치였다. 정부는 다른 보상 수단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153
 
전쟁이 시작되기 전인 공민왕 5년 6월 이후부터 8년 12월 사이의 평화기는 공민왕이 관료 체계를 정비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153
 
조선은 이 문제를 지극히 엄격하게 취급하여 조선시대에는 환관이 폐해가 없었다. 154
 
조선 건국에 이르는 시기에 강행되었고, 그것은 실로 혁명적이었다. 왜냐하면 기존의 소유관계를 전면 부정하고 재편성 155
 
국방문제는 궁극적으로는 토지문제였다. 그 이유는 첫째, 국가는 토지 분배를 통해 백성들에게 병역의무를 요구할 수 있었다는 점 156
 
당시의 지식인들은 원에 대한 사대를 정당한 것으로 수용 ... 원의 세계주의적 문화에 동조 158
원의 세계주의적 문화
 
역사적 시간의 의미는 당대에는 알려지지 않으며, 과거와 함께 미래의 시간들을 배경으로 할 때만 떠오른다. 159
 
공민왕 8년 이후 6년여에 걸쳐 대전쟁이 고려를 유린했고, 공민왕은 좌절 끝에 정치의 전면에서 퇴장했으며, 그의 치세가 끝나자 14년에 걸친 폭정의 시대가 도래했다. 160
 
원을 섬긴 이래 태평한 날이 오래되자 164
 
고려의 군사 조직은 일본 정벌과정에서 원의 군대에 통합되었다. 164
 
그러나 많은 희생자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서경을 수복하고 2월에는 홍건적을 축출했다. 167
 
가뭄이 계속되자 왕은 하루 한 끼씩만 먹었다. 167
 
왜구가 양광도(지금의 충청도) 일대를 불태웠다. 167
왜구가 경상도만이 아니라 충청도까지도 쳐들어왔구나...
 
... 하고 죽었다. 168
 
홍건적같이 훈련되지 않은 4만여 명의 농민 반란군에게 제2의 도성을 함락당하고 수도의 포기를 고려해야 할 정도로 고려가 쇠약하다 168
 
공민왕의 남행을 따라나선 관리는 28명에 불과했다. 171
초라하군...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으로 간 신하들, 선조를 따라 북으로 가던 신하들...
 
공민왕 11년 1월 정세운을 군사 20만으로 개경을 포위하여 홍건적 10만여 명을 죽이고 나머지 10만여 명을 축출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171
농민군 vs 농민군
자기 나와바리에서는 똥개도 호랑이를 이긴다는 말이 떠오른다.
 
최고 지휘관이 상벌권을 장악하지 않으면 지휘관들은 전공을 다투기 위해 지휘 계통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지휘권이란 상벌권과 같은 의미이다. 173
 
수도를 함락당함으로써 왕은 정치적 정통성과 위신에 커다란 손상을 입었다. 한편 전군의 지휘권은 장군들에게 장악되어 있었다. 173
 
더 큰 비극은 전쟁 다음에 왔다. 대승을 거둔 지 나흘 뒤, 안우, 김득배, 이방실이 총병관 정세운을 죽였다. 173
 
현명한 음모자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의 내면에 깃든 악을 이용하여 자신의 악을 행한다. 175
以夷制夷
 
왕은 기본적으로 주위의 모든 인간을 신뢰할 수 없다. 180
 
완전한 불신 속에서는 정치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히에로의 지적처럼 공포에 사로잡힌 왕의 주위에는 무능한 자들만 남게 된다. 180
merit vs loyalty
 
왕의 전정한 능력은 그 자신의 특별한 재능보다, 위험하지만 풍부한 재능을 지닌 사람들을 선용할 수 있는 균형감에 있다. 180
레이건
 
무슨 일에서나 그리고 어디에서나 스스로를 선한 인간으로만 내세우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많은 악인들의 무리 속에서 파멸될 것이다. -마키아벨리 180
 
정치가들의 경우 당대를 넘어서는 의미를 이해한다 해도 정치적 불가피성은 그들에게 한정된 선택을 강요한다. 181
한정된 선택을 강요한다.
 
역사의 목적은 그것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기 때문에 탄생된다. 181
역사는 역사의 의미를 궁구하는 사람들의 것
헬스장은 헬스하는 자의 것
책은 읽는 자의 것
하나님 나라는 기도하는 자의 것!
 
정몽주의 이러한 질문들은 매우 독특한 인간의 탄생을 보여주고 있다. ... 현세에 있으면서도 현세 너머에서 현세의 문제를 통찰하려는 인간 ... 행위의 불변의 원칙을 가져다 주고 삶의 영원한 의미를 부여해주는 것을 탐색하는 인간 184
 
성리학은 인간의 구원을 인간의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완성하려는 시도였다. 185


 정몽주의 제문은 바로 그 자신이 김득배의 죽음을 통해서 역사의 참다운 이념을 근본적으로 자각했음을 보여준다. 186
 
정몽주의 제문은 고려 정신의 태내에서 새로운 유형의 정신과 인간이 나타났음을 보여주는 첫 번째 기록이다. 187
새로운 유형의 정신과 인간의 탄생
 
인간과 세계의 근거 ... 역사와 정치 속에서 동시에 발견하려는 질문은 정몽주가 처음 187
 
공민왕의 입장에 따른다면 장군들의 죽음은 왕국의 안전을 위한 불가피한 요청이었다. 187
불가피한 요청
 
정치의 도덕성에 대한 신념은 조선 정치의 근본적인 뿌리를 이루고 있었다. 188
 
공민왕 6년 이제현이 시작한 이래 이색마저 시작한다면, 새로운 비전을 가진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두 인물이 떠나는 것 189
 
공민왕 11년 12월 왕은 원이 덕흥군을 고려국왕으로 삼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191
 
공민왕은 12년 2월 왕의 행차는 개격의 남쪽 흥왕사에 이르렀다. 윤 2월 辛味朔(초하루삭) 밤, 김용이 반란을 일으켜 흥왕사를 기습했다. 경호병들은 모두 도망가고 왕은 고국공주의 용기와 환관 안도적의 희생으로 목숨을 구했다. 환관 이강달이 왕을 업고 명덕태후의 밀실에 숨기자 노국공주가 그 문을 막고 앉았다. 한편 왕과 용모가 비슷한 안도적이 왕의 침전에 누워 대신 죽었다. 홍언박도 피살당했따. 그러나 최영 등의 무장이 난을 진압했다. 신하들에 대한 왕의 불신은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191
 
김용의 반란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점은 반란자들이 제지(帝旨, 원황제의 명령)를 칭했다는 점이다. 192
 
‘누구를 믿을 수 있겠는가’ ... 김용의 정치적 행적은 결국 공민왕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김용은 왕이 공개적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을 대신해왔던 것이다. 193
 
문빙(文憑기댈빙): 증거로 삼을 만한 문서 198
 
13년 1월 덕흥군의 군대 1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 고려군을 패퇴시켰다. 199
 
최영은 가혹한 군법을 적용하여 도망병을 모두 참수함으로써 비로소 군대를 정돈할 수 있었다. 199
 
최영이 이끄는 고려군은 덕흥군의 군대를 격파했고, 그들은 국경 너머로 도주했다. 동북 지역을 침범했던 여진족을 이성계에 의해 격퇴되었다. 199
 
이 전쟁은 실질적인 의미에서 고려가 원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음을 의미했다. 200
 
고려는 또한 세 차례의 대규모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풍부한 잠재력을 과시했다. 200
 
원의 지배하에서 100여 년간의 평화를 누린 뒤 고려는 이 시대에 들어 가능한 모든 재난 속에서 신음했다. 200
 
공민왕은 풍수지리설과 비기도참설, 그리고 불교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이 세가지 형태의 정신물리학 201
 
그것들 모두는 운명을 주재하는 초월적인 ‘힘’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202
 
그는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김부식을 조선 역사의 적으로 비판했다. 204
- 신채호
 
묘청과 김부식의 대결 ... 고려 안에 혼재된 상이한 정치 이념의 본격적인 충돌 207
 
묘청의 난에서 폭발한 이념적 긴장 207
 
정치에 종사하는 일이 세습적 특권이었던 시대 208
 
정치적 책임에 대한 각성 ... 정치변동에 대한 합리적 근거 208
 
고대 국가에서 백성은 풀잎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백성’의 발견은 중대한 전환을 내포하고 있었다. 208
백성의 발견
 
묵자 “만일 성인으로 하여금 그의 뛰어난 신하와 재상들을 불러 모아 함께 의논하게 한들 어찌 수백 세의 뒷일을 알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귀신은 그것을 알 수 있다.” 샤머니즘은 인간의 취약성을 나타내는 한편, 인간이 식물 및 동물과 달리 스스로의 존재를 개체로서 인식하고, 시간관념을 가졌으며, 상상의 것을 이해하는 능력을 가지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209
 
주공은 하늘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개념을 바꾸고 있다. 그에게 하늘은 불가사의한 힘power이 아니라 공정한 ‘원리principle’이다. 210
 
주공은 새로운 의미의 인간이다. 210
 
공민왕이 역대의 다른 왕들처럼 개인의 복리가 아니라 위국의 도리를 물었다. 212
 
자신의 많은 보시가 어떠한 공덕을 가지고 있는냐는 양 무제의 질문에 달마대사는 아무 공덕이 없다고 대답했다. 석가모니는 외적인 선행이 내적인 진리와 근본적인 의미에서 비교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213
달마대사는 양나라 사람이구나...
 
대학 ... 중국 문명이 이룩한 모든 정신적 업적에 특정한 질서를 부여한다. 217
 
주자는 이상적인 정치 공동체란 안전과 이익의 결사체가 아니라 커다란 학교라고 생각했다. 218
 
이제현 이전에는 학문, 인격, 그리고 정치의 연관 관계에 대한 관념이 잘 이해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219
 
[대학]의 정치적 예봉은 정확히 이 책을 겨냥하고 있었다. 220
정관정요
 
주자 정치학의 매니페스토 221
매니페스토 = 선언
 
보우는 “한양에 도읍하면 36국이 조공한다”고 주장했다. 222
 
풍수지리설은 인문지리학과 음양오행설이 융합되고 여기에 인간의 운명론이 덧붙여진, 궁극적으로는 산천의 지세에 의해 인간의 운명을 개선하려 한 일종의 공리화복설이었다. 223
 
풍수지리설은 초기에는 지형을 동식물의 모양에 비유하여 이해하는 類物論이었지만, 점점 복잡한 형이상학으로 발전했다. 223
 
풍수설은 고려왕조의 운명적 탄생을 장식하는 아우라로서 고려왕조의 정치적, 정신적 심연을 이루고 있었다. 224
 
고려에서 도선은 ‘地理國師’로 칭해졌으며, 불교의 원효, 유교의 설총 및 최치원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따. 225
풍수지리 도선
불교 원효
유교 설총, 최치원
 
풍수도참설의 매력은 역시 복잡한 정치적 위기의 원인이 지덕의 쇠퇴에 있고, 이 위기를 천도에 의해 극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부강한 국가가 저절로 도래한다는 순진한 낙관성에 있다. 226
순진한 낙관성
 
민생 배려(無逸) 231
게으름에 흐르지 않음
 
세계는 사유 이전에 주어져 있다는 점에서 운명적이다. 232
이런 문장은 암기
 
자족적이고 고립된 존재는 금수나 신뿐이다. 232
 
인간의 행운에 대한 믿음은 정치적인 성격과 완벽하게 잘 어울리는 것 같고, 결코 합리적 정책과 모순되는 것 같지 않다. 232
 
 
 
 
 
 
 
 
 

 
 
 
 

반응형